KT가 노사 합의에 따라 시행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가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번 판결에서 언급된 판단 근거는 최근 대법원이 제시한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판단기준과 차이를 보였다. 법원이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의 경우 상대적으로 완화된 기준을 바탕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제48민사부(재판장 이기선)는 16일 KT 전ㆍ현직 근로자 A 씨 등 1300여 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법원은 이날 같은 내용의 소송 2건에 대해 동일한 판단을 내놨다.
조합원 총회 없이 임피제 도입..."노조법 위반, 무효"
KT 노사는 2014년 정년을 만 60세로 연장하는 대신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KT 노조는 이 과정에서 조합원 총회를 거치지 않았다.
이 합의에 따라 만 56세 직원에게는 기존 임금의 90%가 지급됐다. 만 57세는 80%, 만 58세 70%, 만 59세 60% 비율로 차등 적용됐다.
A 씨 등 1300여 명은 같은 해 12월과 이듬해 1월 임금피크제가 조합원 총회 의결 없이 도입됐고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임금을 차별해 무효라면서 감액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제기 전 민주노총 법률원은 의견서를 통해 "조합원 총회의 의결없이 밀실에서 노사 합의를 함으로써 노동조합법 제16조 1항 3호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노동조합법 제16조 1항은 단체협약에 관한 사항의 경우 조합원 총회 의결을 거쳐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사 합의 당시 임금피크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할 정도로 KT 경영 상황이 위기에 처해 있지 않았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임금피크제 도입의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년연장도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라 이뤄진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법률원은 의견서에서 KT 노조 위원장이 대표권을 남용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노사 합의가 조합원들의 근로조건을 희생해 회사의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체결됐다는 주장이다.
법원 "총회 의결 없어 불법이지만 효력 부정 못해"
그러나 법원은 A 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이 본 쟁점은 세 가지다. 조합원 총회 의결 없이 노사 합의를 체결해 무효인지, 임금피크제가 합리적 이유 없는 연령상 차별에 해당하는지, 노조 위원장이 대표권을 남용했는지 등이다.
법원은 총회 의결을 거치지 않은 것은 불법행위라면서도 임금피크제 효력을 부정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노조 위원장이 노사 합의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절차적 권리를 침해한 것은 불법행위이고 일부 조합원이 KT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서도 이를 불법행위로 보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이 확정되기도 했다"면서도 "내부의 절차적 위반이 있었더라도 합의의 효력이 대외적으로 부정될 수는 없고 이는 대법원 법리에 따른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2014년 4월 노사 합의 이후 노사 합의를 체결한 노조 위원장이 다시 선출된 점도 매우 중요하게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임금피크제가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는 점도 확인했다.
재판부는 "정년을 만 60세로 연장한 것은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른 것이고 이 법은 사업주와 노조로 하여금 정년연장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을 주문하고 있다"며 "여기에는 당연히 임금 삭감이 포함돼 있고 이는 국회 회의록에도 나와 있다"고 지적했다.
임피제 도입 당시 경영 상황도 판단 근거로
임금피크제 도입 당시 KT 경영 상황도 판단 근거로 제시됐다.
재판부는 "2014년 당시 KT 영업손실이 7194억 원이었고 당기순손실은 1조1419억 원이었다"며 "이 밖에도 인력 부족 등의 경영 상황을 보면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른 정년연장에 대응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를 실시한 이후 임금 총액은 오히려 더 많이 지급됐다"고 했다.
실제 임금피크제 시행 전에는 만 56세부터 2년간 일하면서 연봉 200%를 받아갔지만 제도 도입 이후에는 만 56세부터 4년 동안 기존 연봉의 300%를 지급받았다.
또 임금피크제 도입 이후 KT가 업무량을 줄이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꼬집었다.
재판부는 "A 씨 등은 (임금피크제 시행 이후) 업무량과 업무강도를 줄이지 않아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임금피크제는 정년연장에 따라 시행됐다"며 "명시적인 저감 조치가 없다고 해서 차별로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합의 당시 노조 위원장이 대표권을 남용했는지에 관해서는 "노사 합의를 고려하면 단체협약의 내재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며 "노사 합의를 했던 노조 위원장이 다시 선출됐고 KT 노사가 6차례에 걸쳐 상생협의회를 열어 임금피크제 세부 사항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점, 임금삭감률 부분에서 KT의 양보를 얻어낸 사정을 종합하면 대표권을 남용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 판단기준'과 차이...정년연장형 기준 완화?
이번 판결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재판부가 언급한 판단 근거가 대법원이 제시했던 판단기준과 달랐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앞서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가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4가지 판단기준을 제시했다.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 ▲대상 근로자들의 불이익 정도 ▲임금 삭감에 따른 대상 조치 여부 및 그 적정성 ▲임금피크제로 확보한 재원이 제도 도입 목적에 맞게 사용됐는지 여부 등이다.
특히 전자기술연구원의 임금피크제는 정년유지형이었다는 차이도 있지만 고령자고용법이 개정되기 전에 시행돼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로 도입됐다는 점도 결정적 차이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때문에 고령자고용법 개정 이후 시행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판단할 때는 법원이 상대적으로 더 완화된 요건으로 판단하지 않겠냐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유사 사건을 다룰 하급심마다 어떤 기준대로 판단을 제시할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은 과제로 남는다.
경영계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법원이 무효로 판단한 임금피크제는 '정년유지형'이었지만 정년연장형으로도 무효 소송이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탓이다.
한 경영계 관계자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고용을 보장하면서 임금을 조정한 연령 상생을 위한 제도"라며 "당연히 그 정당성이 인정돼야 하고 이번 판결을 계기로 혼란이 다소 잦아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피제 혼란 가라앉나...소멸시효 판단은 없어
이번 판결이 임금피크제 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되는 상황이다.
KT를 대리한 류지완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판결 직후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라 정년연장이 돼 그에 대응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경우에는 그 내용이 현저히 불합리하다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한 판결"이라며 "이번 판결 이후에 다른 사건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대법원 판결 이후의 혼란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한편, 재판 과정에서는 임금 청구 소멸시효도 쟁점이 됐지만 이에 관한 별다른 판단은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근로자가 임금피크제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삭감됐던 임금을 청구했을 때 이를 임금채권으로 본다면 3년치 임금에 대해서만 차액을 요구할 수 있다. 반면 이를 불법행위로 볼 경우에는 10년치 임금 차액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류지완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서는) 3년이 지난 것이었기 때문에 소멸시효도 쟁점이 됐었다"며 "다만 A 씨 측 청구가 기각된 만큼 소멸시효에 관한 부분은 판단이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